쉽볼레 - 스스로 Ghetto에 남기
쉽볼레 (Shibboleth)
“’쉽볼레’ 해봐!”
길르앗 사람들이 명령했습니다.
옛 이스라엘 사사(또는 판관) 시대에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동족이었던 에브라임 지파와 길르앗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강 건너 길르앗 땅을 쳐들어갔다가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겨우 강가로 도망쳐 온 에브라임 사람들은 순간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요충지를 길르앗 사람들이 먼저 점령하고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쉽볼레(shibboleth)’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습니다. 겨우 ‘십볼레(sibboleth)’라고 말 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명이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인들이 ‘구약성서(Old
Testament)’라고 부르는 ‘제1성서(히브리성서) 사사기 12장
5절~6절’은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치 ‘시험을 통과해야 경계를 넘을 수 있다. 시험에는 오직 한가지 대답만 있을 뿐이다. 제대로 된 대답을 대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질문으로 시험하고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한가지 길르앗의 ‘쉽볼레’
뿐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십볼레’는 옳은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합니까?”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첫번째 ‘쉽볼레’는 2000년 전의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어렵게 첫 관문을 통과한다고 해도 다음
또 다음 ‘쉽볼레’에 잇달아 대답해야 합니다. ‘십볼레’는 옳은 대답이 아닙니다.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믿습니까?”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이 있습니다. 교인으로
등록해야 하고, 몇 달 또는 몇 년 교육을 받은 후 세례문답을 합니다.
일생을 걸고 심사숙고해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무거운 질문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예! 믿습니다! 제가 다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해야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강 이쪽과 저쪽,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를 넘은 사람이 됩니다. 아니면 강 저쪽, 길르앗 땅에 남겨진 에브라임 사람처럼 죽음을 맞습니다.
경계를 정하는 일, 경계를 지키는 일, 경계를 넘어간 사람을 벌주는 일, 언제 무슨 이유로 어떻게 설정됐든
한번 경계가 세워지면 사람은 그 경계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경계는 구분한다는 뜻을 가진 ‘거룩’이었습니다. 거룩은
원래 의미와 상관없이 ‘쉽볼레’라는 암호가 됐습니다.
암호는 한가족이나, 내가 특별히 허락한 사람이나, 같은 공동체에 속한 ‘우리’끼리
공유합니다. 모든 사람이 알면 이미 암호가 아닙니다.
예수의 뜻과 달리, 그를 섬긴다는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스스로 세상의
게토(Ghetto)가 되기로 작정한 종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경계를 훌쩍 뛰어 넘고, 견고한 담을 무너뜨리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쉽볼레’ 암호를 묻는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난 예수는 기독교라는 게토 안에 묶어 둘 수 없는
분입니다.
<끝>
기독교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