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예수> 북 콘서트를 마치고





<소설 예수> 북 콘서트를 마치고 

1월 14일(토), 오후 2시 ~ 5시 30분까지 덕수궁길 ‘정동1928아트센터’에서 <소설 예수> 북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조동길 소설가/공주대학교 명예교수는 문학적 조명을 통해 ‘7일간의 간절한 물음, <소설 예수>에 담긴 경계의 미학’이라는 주제발표를 맡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나 동학이나 불교나 위대한 가르침에는 경계가 없고 또 없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라고 파악하면서 ‘천변풍경(박태원), 사반의 십자가(김동리), 사람의 아들(이문열)’의 맥을 잇는 소설’이라고 평했습니다. 

 이어 강현주(바이올린) 단장이 이끄는 6인의 ‘서울 M&P 챔버 오케스트라’에서 베토벤 모짜르트 그리고 벤자민 브리튼의 곡을 연주했습니다. 

 최윤선 선생(전 선일여고 국어교사)은 파워 포인트를 이용하여 <소설 예수>를 읽은 독자 평을 재기 발랄하면서도 조목조목 의미 있게 발표했습니다. 이후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 40명이 넘는 독자들과 아주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7월 25일, 5권 6권 7권을 한꺼번에 발간한 이후 6개월 남짓 기간에 여러 행사가 있었습니다. 범교단적 기독교 단체 ‘예수살기’에서 9월 15일 '출판기념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청파감리교회 평화부와 문화부가 합동으로 주최한 ‘작가와의 대화’에서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외, 몇 번의 크고 작은 모임에서 왜 이 책을 썼는지 제 생각을 전했습니다. 

 


<소설 예수> 전 7권, 무겁고 두꺼운 책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책을 들고 가시는 일은 고생이고, 읽기는 고행苦行일 것입니다.” 

 문학계로부터 소설에 대한 비판도 들었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기독교쪽에서 전해오는 염려와 격려도 들었습니다. 

이전부터 말씀드렸듯, 이제 모두 독자에게 달린 일입니다. 변명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일입니다. 오해가 있다면 작가가 기술을 잘못했기 때문이고, 부족하다면 초보작가의 첫 소설이기 때문이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생각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이든 학술논문이든, 독자와 작가 사이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쑥 엉뚱한 소리를 내질러 독자를 당황하게 하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독자를 차근차근 설득하고 미리 암시를 제시해야 합니다. 작가가 제시하는 결론을 독자가 혼란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장치를 제시하는 일은 작가의 책임입니다. 깜짝 놀란 독자를 바라보며 작가 혼자 낄낄 웃거나 으쓱거린다면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도 무례함이 분명합니다. 

 <소설 예수>의 독자는 21세기에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2000년 전 서기 1세기,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니 시간과 공간의 차이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문화 또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큰 간극이었습니다. 

 3가지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기독교에서 종교적 교의敎義 교리로 2000년에 걸쳐 정리하고 해석하여 틀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제가 사용하는 단어, 표현 등을 독자는 우선 기독교적 해석의 툴(tool)을 통하여 이해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둘째, 1세기 그 지방의 삶에 대한 기술들(성경을 포함해서)은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아람어)가 아닌 헬라어(그리스어)나 로마어로 기록됐습니다. 20세기 21세기 들어와 고대 헬라어나 로마어로부터 직접 번역된 기록들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 서로 다른 언어로 몇 번에 걸쳐 번역됐던 마지막 번역에 의지해서 독자는 2000년 전 그들의 삶을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셋째,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적 환경, 문화에 따라 달리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아버지' '어머니' '집' '남자' '여자' '권리' '의무' '자유' '은혜' '구원' '축복' 그런 단어들조차 1세기 사람들과 21세기 독자가 서로 달리 받아들입니다. 의미(meaning)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어와 문장 텍스트의 번역과 해석이라는 차원을 넘어 당시의 문화와 사회적 환경(social setting)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소설 예수>를 쓰면서 역사적 신학적 배경 뿐만 아니라 1세기의 문화적 사회적 연구 결과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50~60년 동안에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와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연구들은 아직 '기독교 신학'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되고 있었지만 저는 소설 속에 과감하게 반영했습니다. 

책 쓰기를 끝마칠 때까지 저를 사로 잡은 당돌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알려진 텍스트(Text)나 새로 발굴된 문헌을 재해석(Re-interpretation)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설 예수>를 통해 텍스트를 재구성(Re-construction)한다.” 

 21세기의 독자는 마치 단단한 진주 같습니다. 하루 아침에 형성된 자아自我가 아니고 수천 년에 걸쳐 조금씩 단단해지고 매끄러운 겹으로 쌓인 결정結晶입니다. 맨 바깥 층은 물론 21세기에 형성됐습니다. 단단한 자아 안쪽에 자리 잡은 층으로 들어가려면 겉 층을 깬 다음 그 곳으로부터 계속 깨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초보 작가인 저는 반복이라는 수단 밖에 몰랐습니다. 지루할 만큼 반복하면서 독자가 예수와 만나는 지점을 마련하려고 했습니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따를 일입니다. 7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으면서 독자들 가슴에 제가 반복했던 얘기가 남아 있기를 바랠 뿐입니다.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수 이야기였기에 특별한 반전을 마련할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얘기를 끼워 넣어 소설의 주인공 예수의 얼굴에 흠집을 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혹 어떤 유혹에 넘어갈까 봐 ‘눈이 서늘한 여인, 잘 익은 살구향이 나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동무 히스기야의 정인情人으로 일찌감치 설정했습니다. 

 

1월 14일 북콘서트에서 나온 얘기 중, '소설은 교훈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재미로 읽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다’는 말에는 작가로서 자신이 없고, ‘교훈’이라는 점에서는 결국 독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벽, 경계를 깨뜨려야 하는 일이었으니 두고 보아야 할 일 같습니다. 

 ‘소설은 하고 싶은 얘기를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하면서 <소설 예수>를 썼는데 맛깔스럽게 잘 정돈해서 그릇에 적당히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다음 작품을 그렇게 쓸 수 있을지, 그런 시간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음 이야기가 자꾸 저를 잡아 끕니다. 

 <끝>

댓글

  1. 재미가 없는 것은 윤작가의 잘못이 아니죠. 예수님은 재미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예수님은 존경의 대상이며 신자에게는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인 분이죠.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고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존재하는 창조주입니다. 윤작가가 장기간 치열하게 자료를 조사하여 기록한 소설예수는 중동 아프리카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근거한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의 심정으로 리얼하게 서술한 드라마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교리를 서술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후 제2편을 기대해봅니다. 7권은 너무 많다고 생각되어 1~3권 정도로 말입니다. 윤작가님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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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잘 읡고있습니다.오랜세윌 회자될 력작 쓰시느라 들인 노고 치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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