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기독교에서 풀어 놓기

 


 

들어가는 말

몇 가지 작은 에피소드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책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어느 책에서 읽은 애기입니다. 물고기를 둥근 어항에 넣어 기르지 않는 나라가 있답니다. 물고기가 세상을 잘못 알게 될까 봐 그런답니다. 둥근 어항 속에서 밖을 바라볼 때 사물이 과도하게 커지거나 일그러지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얘기, 미국 9.11 사태 때, 어느 심리학교수가 사건 다음날 912일에 자기 클래스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들었는가?” 그 내용을 각자 종이에 적어내도록 했습니다.

정확하게 1년 후, 같은 클래스 학생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는데 거의 모든 학생들의 대답이 1년전 대답과 달랐습니다. 두가지 대답을 모두 보여주면서 왜 이렇게 달라졌느냐, 이것 당신 글씨가 맞는냐?” 물었습니다. “내 글씨는 맞는데, 작년 것은 잘못 대답한 것이고, 이번 대답이 맞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열쇠를 못 찾아서 한참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다시 보니 책상 위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 얘기는 세상을 보는 시각, 관점의 문제고, 두번째 얘기는 기억의 문제입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자기도 모르게 불편한 기억은 수정한다는 이론입니다.  

세번째 얘기는 사람들 인식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광경이나 사물을 볼 때 매번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잠재의식 속에 잠겨 있는 먼젓번 이미지를 불러내서 지금 보는 것과 합성한다는 이론입니다. 매번 보는 대로 모두 기억한다면, 사람의 기억 용량이 감당할 수 없게 되지요. 그렇게 매번 눈에 보이는 것을 사진 찍듯 다 기억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 겪는 고통에 관한 논문도 있습니다.

 

 

예수, 그는 누구인가?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Son of GOD), 주님(Lord),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Jesus Christ)라는 존재론적 고백 3가지가 합쳐졌지요.  

그런데 위에 말씀드린 예수라는 존재(Being)에 대한 고백에 덧붙여 그의 활동(Doing) 대한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죽었다.”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느님에 의해 높여져 하늘에 올랐다.”

하느님 옆에 앉아 있다.”

다시 세상에 온다.”

그분이 세상을 심판한다.”

선하다고 판정 받은 사람은 그분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린다.”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선한 사람이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기독교 교리의 커다란 한 cycle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누구냐?” 그리고 살았을 때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은 커다란 cycle 앞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작은 cycle이고요.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던 시각, 관점의 문제, 시간과 기억의 문제, 그리고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는 이미지, 즉 상의 문제가 모두 적용되었습니다.

<소설 예수>의 배경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 시기, 서기 33년부터 따져보겠습니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후 바울이라는 사람이 첫 편지를 씁니다. 기독교인의 성경에 실린 문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인데 그리스 데살로니가에 사는 믿음 공동체에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공동체는 바울이 전한 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쓴 편지가 분명하다고 신학자들이 밝혀낸 7개의 편지들, 그리고 그가 썼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썼는지 불분명한 몇 개의 편지, 다른 사람이 바울이 죽은 다음에 바울의 이름으로 쓴 편지들, 14개의 바울 서신이 포함되었습니다.

서기 66, 예수 처형 33년 후부터 로마와 유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서기 70년에 유대가 로마에게 멸망합니다.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모두 쫓아냈습니다. 그로부터 유대인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2000여년 동안 전세계를 유랑하게 됩니다.

유대전쟁으로 성전이 무너지고 유대가 멸망한 이후, 복음서가 씌었습니다. 기록된 순서는 성경에 수록된 순서와는 달리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순서로 기록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전부터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이 요한복음보다 늦게, 즉 서기 110~ 120년 사이에 기록됐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성경 기록의 역사를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은 성경책에 수록된 문서들의 순서와 전혀 다른 순서로 편찬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다는 뜻입니다. , 순서를 통한 왜곡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낸 서신 속에 나타난 신앙고백,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바로 그 고백을 설명하기 위해, 복음서가 기록됐습니다. 이 말은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디에서 무엇을 가르쳤고, 어떻게 죽었고, 예루살렘에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했다는 내용을 모른 채 바울이 전한 대로 하느님의 아들, 주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나지도 않았고, 직접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그의 편지를 통해 고백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누군가에게서 예수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예수 처형 후 23년 후, 그러니까 서기 35년 경에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믿기 시작했다고 판단하는데 저는 훨씬 더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바울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과 짝을 이루면서 사도행전의 전편이라고 믿어지는 누가복음이 서기 110~ 120년경에 기록됐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에게 예수 애기를 전해준 사람에게도 기억의 문제, 관점의 문제, 의식 속에 잠겨 있는 이미지의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그런 문제들이 바울 식으로 작동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썼는지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원시 안경, 근시 안경, 난시 안경을 쓴 사람과 보통 사람이 보는 사물이 똑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안과 의사가 정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뿐입니다. 둥근 어항 속에 들어 있는 물고기가 보는 사물이나 세상이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내가 본 것, 아니면 믿을 만한 어떤 사람이 본 것만 유일하게 옳다고 애기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기억에 의존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한편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문서라면 그 글을 읽을 때 주관적인 진술과 객관적 진술을 판별해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게 됩니다.

 

소설 예수

제가 쓴 <소설 예수>는 제가 만난 예수를 그렸습니다. 아직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이 있기 이전의 예수 얘기입니다. 바울의 신앙고백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밝히려는 목적을 가진 복음서 중 어느 것도 기록되기 이전의 예수입니다. 갈릴리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유대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한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에 대한 얘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에서 그리스도를 뺀 예수의 얘기입니다. 아기로 태어나고, 엄마 젖을 빨고, 첫걸음을 걷고, 동생들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아버지를 따라 일거리를 찾아 다니고, 세포리스 공사장에서 돌을 다루는 인부로 살고, 그러면서 하느님을 찾은 사람.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선 사람, 그러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둔 사람, 언젠가 우리처럼 땅 위에 살았던 사람 예수의 애기입니다.

<소설 예수>에 포함된 애기들이나 가르침은 몇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경에 포함돼 있고, 늘 들어 잘 알고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성경에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해석이 전혀 다른 내용도 있고 어떤 부분은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느냐?”고 저를 비난하지 마십시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가 살던 그때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었고, 특히 예수라는 사람의 성격이나 삶의 방식으로는 분명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관점과 기억과 잠재의식 속에 잠겨진 상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고백이 정당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 후 40여년 지난 다음 기록된 복음서보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훨씬 더 정확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기록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소설 구성을 위해 허구로 창작해 넣은 사건이나 인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상황을 역사적 문서와 고고학적 증거, 문화인류학적 연구자료, 그리고 지리 기후 등의 자료들을 분석해서 적용했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한 자료와 논문, 책자들 중 제가 입수해서 공부했던 내용들을 소설 속에 녹여 넣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 <소설 예수>에서

<소설 예수>에서 예수가 얘기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다.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그분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철저하게 비우고, 사라졌다.”

하느님의 죽음을 얘기하는 프리드리히 니체, 하느님이 숨었다고 말하는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 그리고 하느님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영국의 철학자며 신학자인 돈 큐핏의 말을 따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다음에 다음 얘기를 덧붙여서 그들과는 다른 걸음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창조주의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 하느님은 사람 속에 스며 들었다. 그리고 사람이 되었다. 따라서, 사람이 된 하느님, 하느님이 된 사람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사람이 주인이 되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다.”

사람이 그 마음 속에 하느님을 모셨으니 더 이상 다른 신이나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고, 억압이나 두려움에 눌리지 않고, 자율성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자기 운명을 신에게 맡겨 놓고, 세상의 종말을 향해 속절없이 떠 밀려가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아직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 하느님 나라를 이룰 가능성이 남아 있고, 아직 그럴 수 있는 시간도 남아 있다.”

이 세상은 사람이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지막 세상이다. 죽어서 가게 될 다른 세상을 준비하는 죽음 전단계의 세상이 아니고, 여기가 인간에게는 마지막 세상이다. 그러니 다른 생명을 아끼고 돌보고 사람과 더불어 잘 살아가야하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세살까지는 젖을 먹이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며 키우지만 때가 되면 젖을 동여매고 모질게 젖을 떼지 않는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는 것이 어머니에게서 첫번째 분리라면, 자라나면서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 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때 또 한 번의 분리를 경험하는 것 아닌가?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두발로 세상을 딛고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또 말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두발로 세상을 살기 시작하듯, 사람들도 나에게서 벗어나 각자 스스로 깨달은 길을 걸으며 살아가십시오. 십자가 아래 모여들지 말고, 십자가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지시받은 대로 정해진 대로 걷지 말고, 왜 그러냐 스스로 묻고 또 물어서 스스로 깨달은 답을 안고 그 답에 따라 사세요.”

 

<소설 예수>를 쓰는 동안 저는 정말 날마다 행복했습니다. 어떤 때는 꿈 속에서도, 예수를 만나 대화하고 묻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고통도 들었고, 아픔도 들었고,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믿되 끝까지 믿는 분이었습니다.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스스로 길을 찾고, 일어나 걷기 시작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 해결해줄 테니 내게 오라. 나는 모든 해결 방법을 다 알고 있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얘기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밥상 차려 놓고 불러 모아 입에 떠 넣어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면 안 먹어도 배부르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고 추우면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환난과 고통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겨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겪은 고난은 인간이 고통과 외로움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인간의 한계를 무한대로 키우는 좋은 사례였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서 더 나가십시오’,

내가 여기까지 징검다리를 놓았으니, 당신들도 당신 몫의 징검다리 돌 하나를 놓으십시오

할 수 있다고 그대 혼자 휘적휘적 개울을 건너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 돌 하나 주워 징검다리를 놓으십시오

제가 들었던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예수>에 이런 얘기들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그를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그를 기독교라는 저수지에 가두지 않는다면, 불교 이슬람 힌두교 천도교 등 다른 어떤 종교에게도 손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손을 잡으면 21세기, 지금 곧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함께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기독교가 인류에게 끼친 큰 공헌을 인정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독교만의 예수가 아니라 인류의 예수로 풀어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2000년 동안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던 예수를 이제 풀어 놓읍시다.

<소설 예수>는 그런 얘기를 하기 위한 작은 출발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전제. from 

https://www.crossroadsinitiative.com/media/articles/seven-last-words-of-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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