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러 나왔더냐?


 

무엇을 보러 나왔더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으면 ?’라고 물으며 의미를 찾게 됩니다. 마음 속에 끝없이 떠오르고 또 떠오르는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하면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거나 골짜기를 벗어납니다. 제가 그러했듯, 잘못하면 골짜기에서 등성을 오르고 또 골짜기로 걸어 내려가고, 헤맸던 길을 돌고 또 돌면서 엉거주춤 살게 됩니다. 명상가 사색가 철학자도 못되고, 몸을 내던져 새 길을 찾아 나서는 활동가 탐험가 운동가도 아니고

 

35년 전 추운 겨울 날, 스페인 중부 고원지대 자라고자(Zaragoza) 산등성, 거칠게 불어 올라오는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 들었습니다. 뼈속까지 시리고 추웠습니다. 상대가 건네 준 두툼한 군용 점퍼도 매서운 산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날, 저를 그대로 놔두지 않는 질문 하나에 사로잡혔습니다. 건너편 산등성을 바라보고 서있다가 당시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고 박정오 목사님의 음성을 문득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을 박정오 목사님이 외쳤습니다. 음성은 쇠북을 두드리듯 강렬하고 강했고, 피하려고 귀를 막으면 제 몸을 마구 흔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제 생을 걸고 대답해야 할 엄중한 질문이 됐습니다. 왜 유독 그 말이 제 가슴 속에 콱 들어와 박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고, 아니면 의미를 찾으려고 제가 그 말에 과도하게 집착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무엇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가?’

결국 ?’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그 질문들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고상해 보이는 그런 질문으로 인생의 의미를 더듬지 않아도 더 중요한 의미를 삶을 통해 몸으로 보여주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 것이 마음 속에 들어와 자리 잡으면 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보는가?’

세상을 통해 나를 보고, 나를 들여다봄으로 세상을 봅니다. ‘나와 너와 우리가 존재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관계를 설명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존재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보고 관계를 맺음으로 완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온갖 추상적인 명사名詞들을 동사動詞로 바꾸면 내 삶에서 꼿꼿이 일어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님

그리스도

사람들이 고백하는 예수라는 존재(Being)가 동사(Doing) 형용사가 되기도 하고 술어術語를 품은 주어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어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바뀌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나서야 합니다. 존재에 대한 고백을 넘어 살아 움직이는 삶의 관계로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쓴 <소설 예수>는 예수를 찾아가 만난 제 고백입니다. 어쩌면 스페인 고원 바람을 타고 제 속으로 쑥 찾아 들어온 사람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예수>를 쓰고 출간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과 관계 맺은 관계가 됐지요.








그런데, 정말 큰 일이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절박감에 빠져 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힘에 부칠만큼 큰 얘기를 이제 겨우 끝냈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저를 몰아붙입니다.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예수는 자꾸 손가락으로 현실을 가리킵니다. 현실은 광야에서 돌아온 사람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에 밑줄을 긋든 현실에 밑줄을 긋든 그는 저를 자꾸 흔듭니다. 예수 자신에 대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사람들의 삶을 얘기하라는 모양입니다.

이미 쇠는 한국 나이로 73살이 넘었는데 자꾸 구석으로 몰립니다. 어디로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그 음성을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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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삶은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마지막을 아름답게 의미있게 마치기 위한 것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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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인생이 고통이기도 하지만 오직 한번 누리는 찬란한 축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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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총이고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다음 세상의 준비단계 또는 전단계가 아니고 마지막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삶을 가장 아름답고 충일하게 살아야할 의무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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