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와 찬송가


<손녀와 찬송가>

 

손녀는 느릿느릿 부르는 구슬픈 찬송가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매주 한번 돌아가면서 열리는 가정예배 모임에 외할머니 친할머니를 따라갔다가 찬송가 부르는 시간이 되면 울음을 터트리거나 귀를 막고 엎어졌다고 합니다.

? 이 노래 싫어?”

눈을 꼭 감은 손녀는 고개만 끄덕였답니다. 세 살 아기가 찬송가 가사 때문에 그럴 리는 없고, 곡조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중학교 시절, 저도 교회 새벽 기도회에 열심히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마루바닥에 엎드려 오래오래 기도드리던 어느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엎드려 기도하던 자리에는 언제나 눈물자국이 그득했고 찬송을 부를 때면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작은 목소리로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슬픔도 사연도 많은 할머니 같았습니다. 소읍이라서 길거리에서 그 할머니를 만나면 더 공손하게 머리 숙여 인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쩐지 그분에게는 꼭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할머니 생각을 하면 저절로 떠 오르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쌍둥이 형 에서가 배고픈 틈을 타 야곱은 팥죽 한그릇을 주고 장자권長子權을 넘겨 받았습니다. 형처럼 차려 입고 목소리까지 꾸며 아버지를 속여 넘기고 형 에서가 받을 맏아들에게 내려주는 축복도 가로챘습니다. 늙어 노쇠한 아버지가 눈이 잘 안 보일 때 저지른 일입니다. 형의 분노를 피해 멀리멀리 다른 지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어느 곳에 이르러 돌 하나를 주워 베개 삼아 하룻밤 잠을 자다가 하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베델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돌베개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어느 날 하느님의 축복으로 변하리라는 소망입니다. 여기가 베델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늘 문을 열어 달라는 청원이기도 합니다. 신산辛酸한 삶을 살아본 사람일수록 소망이 크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에서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초월자에게 나를 좀 도와 주소서!’ 간구하는 것이야 말로,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어떠한 종교를 가졌고 어떤 신을 믿든 마지막 기댈 언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찬송가 구절을 되 뇌일 때마다, ‘고생’,‘야곱’, ‘돌베개그리고 찬송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문제, 기독교의 믿음과 구원이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나 아무런 생각없이 그 찬송을 부르고, 도움과 구원을 간구하고, 나의 고생과 야곱의 고생을 동일시합니다. 그럴 때면, 기독교가 원시종교에서 얼마만큼 걸어왔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설교도 아니고, 성경 봉독도 아니고 그저 많고 많은 찬송가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면 할말은 없습니다. 예배 중 어떤 순서는 더 중요하고, 어떤 순서는 그저 그렇고, 그 찬송가처럼 혹 문제가 있어도 큰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을 들려주고 싶을 뿐입니다.

어떤 의식을 치를 때, 연속하는 순서 중에 하나라도 잘못되거나 빠지거나, 순서가 뒤바뀌면 의식은 실패한 것이다. 의식이란 그런 것이다.”

Mary Douglas라는 학자가 <Purity and Danger>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구약성서라고 부르기도 하는 히브리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 얘기를 읽을 때마다, 무엇을 상징하려고 그런 얘기를 후대에 기록해 넣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 얘기인가? ‘돌베개와 야곱에게 내린 축복이라는 얘기를 지금 고생하며 사는 사람에게 약속된 미래의 축복으로 일반화하는 기독교는 어느 정도쯤 진화된 종교인가? 들판에 나갔던 기독교가 자꾸 동굴 속 신화의 시대를 들락거리는 이유를 묻게 됩니다.

<소설 예수>에서 그리는 예수는 그 동굴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소설 예수>에 나오는 역사적 예수는 2000년 전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끝난 사람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남산 꼭대기나 정릉 골짜기 어디에서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주일마다 교회에서 쫓겨나고, 찬송가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귀를 막는 분입니다. 돌베개를 베고 잠든 야곱이 은총으로 하늘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런 은총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손을 내두를 사람입니다.

은총은 하느님이 내려 주는 축복이 아니라 그대가 이루는 삶입니다.”

신에게 기대는 일밖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분들에게 너무 매몰찬 얘기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럴 겁니다. 그래서 대답없이 물러서 있는 신 대신에 우리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느릿느릿한 찬송가의 슬픈 가락에 귀를 막았던 손녀가 이제는 가사 때문에 귀를 막을 나이가 됐습니다. <소설 예수>는 손녀에게 들려줄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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